작성일 : 14-04-30 13:53
조선일보 신문 (2014.4.30) '종이로 접어 만든 천 마리의 鶴' 이라는 제목으로 홍문택 교장신부님 글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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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종이로 접어 만든 천 마리의 鶴'
     
                                        
                                                                                         조선일보 2014. 4. 30. A29
        홍문택 신부 花요일아침예술학교 교장
 
 
"33년前 종이학 선물했던 꼬마가 40代 중년이 돼 후원금을 건넨다
臨終 앞둔 호스피스 병동 노인이 나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올린다
버리고 떠나야 하는 司牧子의 삶 그 고운 마음들은 꼭 챙겨 가련다"
 
 
 
   우리 학교는 후원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나는 자주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여러 성당을 방문하곤 한다. 지방의 작은 성당을 방문 했을 때였다. 주일 마지막 미사를 마치자 소박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자매님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섰다.
 
   신부님,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신부님이 저희 성당 보좌신부님으로 오셨을 때 제가 초등학교 꼬마였거든요. 신부님께서 저희를 엄청 귀여워 해주셨고 저도 신부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제가 신부님 영명축일(靈名祝日-가톨릭교회에서는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성인의 축일을 영명축일이라 하고 이날을 생일처럼 지낸다)때 종이로 천 마리의 학을 접어서 선물해 드렸거든요. 33년 전의 일이다. 40대 중반쯤 된 그 자매는 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맞다. 어항 같은 병에 담은 종이로 접은 천 마리의 학...사실 나는 선물을 받을 땐 유리어항에 담긴 종이학이 천 마리나 되는 줄 몰랐다. 나중에 꼬마가 접은 학이 천 마리라는 얘길 듣고 그 정성에 감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을 안 잊고 있어요. 어릴 땐 커서 결혼하면 신부님께 주례를 부탁하려 했는데 시댁이 종교가 없어서 성당서 결혼식을 치르지 못했거든요. 제가 오늘 후원회에 가입을 했는데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매달 조금씩 보내 드릴게요. 그리고 계속 신부님 위해서 기도해 드릴게요.
 
    30여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그 꼬마의 얼굴과 이름과 세례명을 잊은 채 살아 온게 미안했다. 더구나 꼬마의 어린 고사리 손으로 천 마리의 학을 접어 담은 유리어항을 언제가 짐이 된다며 버린게 너무 미안했다. 순간 신부님 그 천마리학, 아직도 가지고 계시나요?라고 묻지 않을까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 자매의 만남은 반가움이었고 미안함이었고 아쉬움이었다.
 
    가톨릭에서 신부로 서품 받는 최소의 나이는 28세이다. 서품을 받으면 보좌신부생활는 2년마다, 주임신부는 5년마다 새 임지로 가서 사목을 한다. 70세를 정년으로 따진다면 은퇴할 때까지 큰 교구에 속해있는 신부는 스무번 이상 이사를 다녀야하는 유랑(?)의 생활을 해야 한다. 스무번 이상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신자들은 낯설어 하는 신부를 과분할 정도로 따뜻이 반겨주어 빨리 새 임지에 적응하도록 도와 주는게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관습이다. 
 
   신부생활을 하다보면 만난 신자 수 만큼, 신부로 산 세월 만큼 마음의 선물과 기도의 선물을 받게 된다. 어린이의 종이학, 할머님의 찐 고구마나 양말 한 켤레, 할아버님의 막걸리 한 주전자 등 정() 담긴 선물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선물의 숫자는 많았지만 누가 언제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삿짐을 자주 꾸리고 떠날 때 마다 짐을 간소하게 정리하고 떠나야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도 누구에게 주거나 정리해 버렸던게 사실이다. 선물을 준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섭섭했겠는가?
   

 
    
    10여년 전 서울의 어느 성당에서 사목을 하던 당시 알게 된 신자분께서 남편의 임종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호스피스 병동에 오실 수 있냐며 전화 연락을 주셨다. 학교에서 병원까지는 너무 먼 거리였고 늦은 밤 이었지만 서둘러 병원을 찾아 갔다. 새 환자복을 깔끔히 차려 입고 나를 기다리시던 할아버님께서는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차근차근 힘겹게 말씀하셨다. 신부님,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신부님 보고 떠나고 싶었는데 너무 먼 곳에 계셔서 망설이다 아내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을 만난 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부님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제가 떠나면 제가 바치던 기도가 끝날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신부님을 보고 싶었고,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드리고 싶어서 연락을 부탁했습니다.
 
   나는 할아버님께서 나를 좋아하시는 건 알았지만 내가 그 성당을 떠난 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죽음이라는 문턱을 앞두고 불안해 할 것 같은 할아버님을 위로해 드리려고 간 나에게 주신 할아버지의 말씀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나에게 주었다. 세상을 떠나시는 할아버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할아버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준비하며 계셨던 것이다.
 
    이웃들의 삶을 자세히 살피며 아픈 곳과 필요한 것을 꼼꼼히 챙기며 보살피고 베풀며 사는 게 신부의 삶이다. 그럼에도 나는 본의 아니게 과분한 존경과 선물이나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버린 신부가 된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어느 날 새 임지로 떠날 때면 버릴 짐을 가려내기 보다 가져가야 할 것이 무언지를 신중히 골라가며 짐을 싸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천 마리 학을 종이로 접어 준 선물이나 임종이 다가오면서도 나를 위해 바쳐주신 애틋한 기도의 선물은 꼭 짐에 넣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