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12-08 15:06
조선일보 신문(2014.12.3) "'신부님 그때까지 사세요?" 라는 제목으로 홍문택 교장신부님 글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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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신부님 그때까지 사세요?
 
                                                                                           조선일보 2014.10.15. A36면
                                                                                           홍문택 신부·花요일아침예술학교 교장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검증되어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은 122년 164일을 살고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잔 칼망(1875~1997) 할머니라고 한다. 하기야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잔 칼망 할머니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이집트의 어부(漁夫)였던 암아트 무싸는 150세까지 살았다 하고, 그루지아 지방의 무슬리노츠 노인은 161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비공식적으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리청유엔이라는 중국인이다. 고산(高山)에서 약초를 캐던 중 신선(神仙)을 만나 기공(氣功) 방법과 운동을 배워 1677년부터 1933년까지 무려 256년을 살며 23명의 부인과 200여명의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1827년 청나라 황실에서 리청유엔의 150세 생신을 축하한 공식 문서가 발견되면서 그의 장수가 사실이 아닌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위대한 학자나 시인, 화가나 존경받는 정치인이 묻히는 곳인데 유독 유명 인사들의 주검 틈에 농장의 하인이었던 토마스 파라는 사람의 주검이 함께 묻혀 있다고 한다. 그가 그곳에 묻히게 된 것은 80세까지 총각이었고 122세 때는 아내의 사별(死別)로 재혼하며 장수했다는 그의 주장이 입소문을 타게 되어 유명 인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찰스 1세 국왕과 만나는 영광도 누렸고 말년에는 런던에 초청받아 호화로운 음식을 먹다가 탈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확실한 검증도 없이 그의 말만 믿고 가장 장수한 사람으로 묘지를 내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결정은 '장수(長壽)'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여기저기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우울했던 50대 초반 어느 날, 갓 취직을 하고 인사하러 온 조카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다. "삼촌이 요즘 몸이 안 좋거든. 그래서 묻는 건데 내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니?" 조카는 쉽게 대답했다. "음, 70세까지요." 조카의 대답을 듣는 순간 무척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 20년 정도만 살 거라는 얘기인데…. 저 녀석은 일흔 살이면 꽤 오래 사는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싶었다.
얼마 전 절친한 교우분과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분 막내 자녀의 근황을 묻게 되었다. "형제님, 막내가 결혼할 때면 내가 그 녀석의 결혼 주례를 설 수 있을까요?" 그 교우분의 막내는 내가 무척 귀여워했던 총명한 아이였고, 이젠 대학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는 수험생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런데 그 교우분은 내 말을 듣자마자 "신부님이 우리 아이 결혼할 때까지 사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렇게 대답한 그분은 순간 큰 실언을 한 듯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10년 정도 지나면 그 아이가 결혼할 나이가 될 터이고 나는 기껏해야 일흔 살일 텐데 말이다. 아마도 그분은 막내 자녀의 결혼이 먼 훗날일 거라고 생각했거나 그때 가서 나이 든 내가 총명한 모습으로 주례를 설 수 있을지 염려하는 마음에서 엉겁결에 나온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스러운 질문으로 그분을 당황스럽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한편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 일이 있었던 다음 날 허리 통증이 심해서 자주 다니는 병원에 들렀다.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한 아기 엄마의 말을 듣게 되었다. "얘야, 너 자꾸 입에 손을 넣고 빨면 저기 있는 할아버지가 혼내실 거란다." 아기 엄마는 두 번이나 같은 말로 주의를 주고 있었다. 나는 주변에 할아버지가 계신가 하고 둘러보았다. 그런데 주변에 남자라고는 나뿐이 없었다. 아기 엄마가 지칭한 할아버지는 분명 나였다.
86세로 우리 곁을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칠순을 맞아 신부들과 조촐한 식사를 하시던 날, "막상 일흔 살이 되고 보니 죽음이라는 게 두려운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새삼 기억난다. 추기경님께서는 70년이란 긴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아직까지 여러 허물을 고치지 못한 채 살아온 게 아쉽게 느껴지고, 앞으로 남은 시간에 얼마나 그 허물들을 고치며 살 수 있을지 생각하니 두렵고 초조하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찬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이 여느 때처럼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최근에 이런저런 말을 들어서인지 '늙음'과 '죽음'이라는 단어를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상념에 잠기다 보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장수의 미련보다 남은 생에 얼마나 많은 허물을 고치며 완덕(完德)을 향해 살 수 있을까 고뇌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얼굴이 잔잔히 떠오른다.
"존경하는 추기경님, 제 나이가 벌써 예순이 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칠순을 맞으셨을 때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며 남은 여생(?)을 잘 준비하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